내 삶의 한계를 인정해야 비로소 내 삶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에 만족할 수 있게 된다. -p.70
정세연은 “아이를 낳든 낳지 않든 책임 있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각자 이바지하는 부분이 있고 그렇게 사람들의 기여가 모여 사회가 구성되는데, 아이를 낳지 않았다고 내가 하는 역할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p.77
‘혼자 살면 젊을 때나 좋지 나이 들어 외롭다’라는 말은 ‘혼자 살면 아플 때 서럽다’와 함께 ‘혼삶’의 입구에서 사람들을 위협하는 오래되고 불길한 2대 경고다. 이 경고를 뒤집으면 사람들은 외로울까 두렵고, 아플 때 돌봄 문제가 걱정되어서 가족을 꾸린다는 말도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 두 문제를 가족 밖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 채, 가족을 만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혼삶’에 외로움과 아픔을 덧칠한다. -p.81
혼자서 장악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돌봄은 신체활동 보조와 위생 관리에 국한된 게 아니니까 말이다. 아픈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밥을 지어 먹고 같이 산책하러 나가는 것, 입원한 친구의 남겨진 동식물을 보살피는 것 등이 모두 돌봄의 행위다. p.105
그런 돌봄 관계망들은 조한진희의 말마따나 “혈연 관계나 친밀한 관계 등으로 배타적 경계를 나누지 않고도 누구나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사회”로 가는 작은 씨앗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 씨앗들이 여기저기에 뿌려지는 광경을 보고 싶다. - p.107
독립과 소속, 자율과 연결, 벗어나기와 잇기, 양립 불가능한 것 같지만 모든 사람이 동시에 품고 있는 갈망이다. 139p.
어쩌면 친구가 줄어드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고 우정을 오래 유지하는 것이 예외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네덜란드 사회학자 헤랄트 몰렌호르스트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7년마다 사회적 네트워크의 절반을 바꾼다. 친구의 반을 잃고, 다시 새로운 친구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147p.
이들 중에는 공간비비의 회원인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비비, 공간비비, 아파트 이웃 중 자신의 필요에 따라 누구는 3개의 원 모두에, 누구는 1~2개의 원에만 걸쳐져 있다. 누구는 밀접하게 누구는 느슨하게 걸쳐져 있지만 그렇다고 자격이나 권리가 다르지는 않다. 159p.
이들은 함께 잘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살면서 같이 정체성을 다듬고, 달라지는 생애주기를 함께 겪으며 삶의 파도를 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출산, 자녀의 취학, 졸업, 취업에 맞추어 부부의 생애주기가 변하듯 말이다. - 165p.
서로의 꼴을 봐주는 것. 서로 신세 지는 것을 받아주고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 혼자서 오래 살아온 솔로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마음이다. 예컨대 나는 남에게 폐 끼치는 상황을 극도로 꺼린다. 누구에게 무엇을 도와달라고 요청하거나 부탁하는 게 어렵고 싫어서 어지간한 일은 혼자 해결하는 데에 이골이 났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때달았다. 내가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부탁하는 것을 싫어하는 만큼 다른 사람이 나에게 폐를 입히는 상황이나 부탁해 오는 것,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받는 것조차 꺼린다는 사실을. — 169p.
“괜찮아, 오지 마”가 “그래, 와줘”로 바뀌었다는 말. 나는 이 말이 묘하게 감동적이었다. 자율과 독립을 가치 선반의 가장 높은 자리에 놓고 살아오던 살마이 굳건하게 믿는 상대에게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순하게 기대는 말, 로맨틱한 관계가 아니어도 가능한 사랑의 고백처럼 들려서였다. 아직 “괜찮아, 오지 마”세계의 거주자인 나도 언젠가는 “그래, 와줘”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게 될까. 그럴 수 있는 마음의 징검다리를 스스로 만들어 낸 그가, 문득 부러워졌다. p.176
그러나 혼자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취약 계층인 것도 아니고, 취약 계층이 따로 정해져 있지도 않다. 생애 굴곡에 따라 불운의 연타를 맞으면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이의 삶이 단번에 취약해질 수 있다. - 193p.
내가 만난 에이징 솔로들은 비혼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거 안정성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현실의 불안, 미래를 바라보고 계획하는 시야를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도 소득 또는 일자리보다 주거 안정성이었다. 196p.
나이 들어 서울에서부터 100킬로미터씩 후퇴해 가면서 거주지를 구하면 여유 있게 살 수 있다는 글이었는데, 꼭 100킬로미터가 아니어도 서울을 벗어나서 살면 된다고 생각해요. 204p.
여름에 수박을 먹고 싶어도 한 통은 너무 크고 미리 잘라 랩을 씌워둔 수박은 위생상 찜찜해 선뜻 사기 망설여지는데, 이제 동네 친구들이 있으니 수박 앞에서 더 망설일 필요가 없다. 각자 일하는 리듬이 달라서 만남이 잦지는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선배와 친구가 한동네에 산다는 사실이 별다를 것 없는 동네를 친근하게 느끼게 해준다. 213p.
우에노 지즈코는 혼자 사는 노인이 혼자서 죽는 게 뭐가 나쁘냐면서 고독사 대신 “재택사”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는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에서 “자기 집에서 살면서 방문 간병, 방문 간호, 방문 의료 3종 세트를 추가”하면 충분히 혼자 살고 혼자 죽을 수 있다고 말한다. 246-247.
서로서로 견디는 힘만 있으면 다른 건 헤쳐나갈 수 있어요. 누군가를 견디지 않고 가능한,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관계가 있나요? 그런 건 없어요. 그런데 좋으니까 견디는 거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좋으니까 그만큼 어떤 부분은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갖는 거죠. 누군가가 나를 감당해 주기 때문에 나도 누군가를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이 공동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기본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257p.
사실 내가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할 때 주로 떠올리는 요소들은 내가 이러저러한 일을 하고 무엇을 좋아하며 삶의 지향은 어떠한지 같은 조각들이다. 혼자 사는 문제를 나 자신의 정체성에 포함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어떤 특질에 대한 자의식이 약한 상태로 살아오다가도 다른 사람들과 제도가 나를 그 특질로 정의하면, 내가 원치 않아도 그 특질이 내 정체성을 구성하는 큰 조각이 되어버리는 듯하다. 내가 여성이라는 점이 그러했고, 혼자 사는 사람이라는 점이 그 뒤를 이었다. 284p.
반면 한국 사람들의 사고에는 몰입의 대상인 ‘가족’만 있을 뿐, ‘나’와 ‘사회’가 없었다. 가족에게 매달리는 정도가 높은 만큼 가족은 교육비로 대표되는 엄청난 비용을 유발해 고통을 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한국인들은 가족을 통한 행복의 희구가 강렬한 동시에, 남 눈치를 보느라 스트레스를 받지만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남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의 조건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고 했다. 311p.
가족이 짊어진 짐을 덜어내고 사회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으로 사회복지학자 김진석은 책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에서 현재의 ‘국가-가족-개인’ 복지국가에서 중간의 ‘가족’을 뺀 ‘국가-개인’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제안했다. 국가-가족-개인 모델은 가족-개인 사이에 부양과 돌봄이라는 가족 기능을 전제하고, 그 기능이 부족하거나 없는 경우에만 국가가 보충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이다. 반면, 국가-개인 모델은 개인의 사회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개입이 가족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개인에게 직접 작용하는 방식이다. 312p.